그런데, 광고에 나오는 그림들이 명화인 것은 알겠으나,
한 작품 한 작품 누구의 작품인지 알만큼 그림에 조예가 깊지는 못하다는 거...
역시나.. 네티즌들은 위대하다...
아주 상세하고 그림과 함께 설명해 놓은 글을 발견...
나중에 참고하기 위해 옮겨 본다...
나는 TV에서 LG광고를 볼 때 마다 마음이 즐겁다.
간접적으로나마 좋은 명화를 TV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제공하기 때문에...
LG에서 계속 이런 좋은 광고를 터뜨려준다면
아마도 나는 LG광고 매니아가 될 것 같다.
LG광고가 다음에도 선전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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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창조[The Creation of Adam]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1475~1564)의 작품(1508~12).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맡아 4년여에 걸쳐 천장을 프레스코로 가득 채웠는데, 그 전체는 〈창세기〉에서 따온 아홉장면, 이를 에워싼 7명의 예언자와 5명의 여자예언자들 및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창세기〉에서 따온 9점의 장면 중 4번째 장면인 〈아담의 창조〉는 하느님이 자신이 만든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창조주 뒤에는 이브의 미래의 모습과 앞으로 태어날 인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불완전한 듯한 육체를 반쯤 일으켜 세운 아담은 손을 뻗쳐 창조주로부터 막 생명을 부여받고 있는 듯한데, 하느님과 아담이 뻗친 손끝이 서로 맞닿으려 하고 있어 긴장을 고조시킨다.
회화보다 조각을 더 우세한 예술형식으로 여긴 미켈란젤로는 이 천장화 연작에서도 인물들을 조각으로 표현했다.
LG광고에 나오는 그림 둘 : 고갱의 명화 '타히티의 여인들'
고갱(Eugene Henri Paul Gauguin,1848-1903)의 "Tahitian Women On the Beach"라는 작품
파리 출생.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이다. 1865년 견습선원이 되어 상선(商船)을 탔으나 1871년 어머니가 죽자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되어 점원생활을 하였다. 1873년에는 덴마크 출생 메트 소피 가드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다. 이 무렵부터 회화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C.피사로(1830∼1903)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1882년 피사로의 소개로 P.세잔, A.기요맹(1841∼1927)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다.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여 P.세뤼지에, M.드니, P.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해 11월 파리로 돌아와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는 깊이 사귀었다. 1887년 처음으로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왔으며, 이어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그 후 다시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을 그리고, 조각·판화·도기(陶器)에도 손대어 보았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18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 Nevermore》《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타히티의 여인들》《언제 결혼하니?》 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 타히티에서도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원주민을 옹호하여 현지의 백인 관헌과 충돌도 일으켰으나,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회복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1903년 환상으로 본 풍경을 그린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을 끝으로 기구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하였다
LG광고에 나오는 그림 셋 : 드가의 '오페라 극장의 대기실'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 The Rehearsal on the Stage, 1874 (Pastel 53 x 72 cm)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이름: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 (Hilaire Germain Edgar De Gas, 1834-1917)
출생지 : 프랑스 파리
드가는 인상파의 창립멤버이지만, 그의그림에는 빛을 강조한 인상주의 기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는 야외에서 작업을 한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실내에서 주로 그림을 그리면서 인체의 다양한 움직임을 새로운 각도에서 포착하였다. 즉, 모델의 인위적인 포즈를 거부하고, 움직이는 순간의 율동감을 재혀하고 노력했다.
"나는 유명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면서 평행 결혼도 하지 않고 친구도 없이 고독을 자랑스러워 하며 살았던 드가.. 그는 말년에 모네처럼 거의 실명의 단계에 이르지만, 파스텔화, 조각 등으로 자신의 예술 혼을 불살랐다.
LG광고에 나오는 그림 넷 :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
아를(Arles)-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밤의 카페 테라스(Cafe Terrace at Night,1888.9)
<고흐의 카페에대한 관련 이야기>
고흐가 1888년 5월부터 9월 18일까지 하루 1프랑을 주고 하숙하였던 아를의 카페 드 라르카사르이다.
고흐는 사흘 밤 잠도 자지 않고 이 카페의 밤을 담았다.
고흐는 "나는 간혹 낮보다는 밤이 더 생동감이 있어, 색채가 넘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카페가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미치게 하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장소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을 빨강·노랑·초록의 무서운 대비에 의해서 표현하고자 한 의도가 이 그림의 화면에
넘쳐흐르고 있다. 그것은 그의 창작 의도라기보다는 이 밝은 아를의 환경에서도 과로 때문에 점점
정신이 이상과민성으로 기울어져가는 고흐의 육체적·정신적 상태를 그대로 표현하였다.
LG광고에 나오는 그림 다섯 : 장 베로의 '매종 빠퀸을 떠나는 일꾼들'
풀밭위의 점심-마네